발간호: 2015-02
도종윤 (제주평화연구원)

1962년, 로베르타 월스테터(Roberta Wohlstetter)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미국 정책 실패의 원인을 첩보의 부재와 정보의 혼란에 있었다고 보았다(Pearl Harbor: Warning and Decision). 2004년, 미국 콜럼비아대학교의 리차트 베츠(Richard K. Betts)는, 9.11테러 발생과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 존재 입증 실패의 원인을 첩보의 미비에서 찾았다(Foreign Affairs May/June).

  정확한 첩보는 정책 결정자에게 내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서 상대와의 전략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탈냉전 후 첩보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닌 ‘액션’으로 격하되었다. 냉전 시대,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자신이 영국 정부의 스파이라는 것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총리와 면담도 한다. 반면, IMF(Impossible Mission Force) 요원인 에단 헌트는 더 이상 정부 고위 관료들을 그들의 안락한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만나지 못한다. 공중전화를 통해 비밀 지령을 받을 뿐이다. 에단은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조직을 위해서 활동한다. 첩보가 정치에서 멀어진 데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 생활 속에 침투된 인권 개념,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 등이 첩보의 본질과는 충돌한다는 생각이 퍼졌기 때문이다. 지금, 첩보는 ‘현실’에서 사라졌거나, 또는 과거보다 아예 더 은밀해졌다.

첩보의 위기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심화된다. 먼저, 탈냉전 이후 대중은 첩보를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냉전의 종결은 확실히 첩보 활동의 양을 줄였다.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정보는 첩보 활동을 통해 수집된다.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쪽이나 탈취하는 쪽 모두 비밀스럽다. 그러나 이제 정보는 첩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화와 공개를 통해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첩보는 오히려 스노든(Snowden) 사태에서 보듯, 내 정보를 대중에게 폭로되지 않게 지키는 것에 더 집중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이제 첩보를 통해 확보해야 할 정보는 훨씬 제한적이고 애매해졌다. 둘째, 정치화(politicization)는 첩보 내용의 분석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첩보 내용은 대부분 불분명하다. 따라서 정치적 신념에 편향되어 분석될 여지가 많다. 첩보의 정치화가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 침해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목격된 바 있다. 정치화된 첩보는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러 방지와 첩보

  최근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Matteo Renzi) 총리는 유럽 차원의 ‘첩보국’을 신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지난 1월 7일, 이슬람주의자 두 명이 프랑스 주간지 ‘사를리 에브도(Charlie Hebdo)’에 난입하여 12명의 직원을 살해하는 테러가 발생한 후에 나온 반응이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Federica Mogherini) EU 외교대표도 테러리즘 방지 차원에서 터키, 북아프리카, 아시아 등과 첩보 교류가 강화되어야 함을 시사하였다. 더 나아가 그녀는 각국에 파견된 EU 대표부에 ‘안보담당역(security attache)’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도 밝혔다. 이른바 첩보 정치의 부활이다. 이런 요구는 프랑스에서 발생한 테러가 첩보의 부재에 일정 부분 원인이 있다는 비난에서 비롯된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 중 한명인 사이드 쿠아시(Said Kouachi)가 이미 몇 년 전에 예멘을 방문하여 알카에다 소속대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당국이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를 경유하는 테러리스트를 감시하기 위해서는 보다 촘촘한 정보 공유와 강력한 첩보활동이 요청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첩보의 정치화? 첩보 정치의 부활?

  유럽연합은 2004년 마드리드 테러, 2005년 런던 테러 등을 계기로 테러 방지 활동의 하나로 첩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EU 공동상황센터(SITCEN)’를 설치한 것을 모태로 2009년 이후부터는 유럽대외관계청(EEAS)에 ‘EU첩보분석센터(EU IntCen)’을 두고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정보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IntCen은 자체적인 정보 획득 메카니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오로지 소극적인 정보 분석에만 의존하고 있다. 때문에 2013년, 비비안 레딩(Viviane Reding) 사법담당집행위원은 2020년까지 해외 첩보 역량을 강화한 첩보국을 둘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유럽연합이 미국의 CIA와 같은 형태의 ‘첩보국’을 신설할 것인지는 아직 알수 없다. 우선, 주요회원국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자국의 정보국을 활발히 가동하고 있는 국가들은 유럽차원에서 첩보 활동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에 미온적이다. 첩보 활동은 통합공동체보다는 주권국가 단위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도 공식적으로는 스파이 활동이 부여된 첩보국의 신설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그보다는 인터폴, 유로폴(Europol) 등 다른 사법기관들과 공조하면서 정보 공유의 폭을 확대하고 분석역량을 높이는 데 더 중점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한다. 첩보국 창설의 근본적 문제는 첩보가 정책 결정에 기여한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한 반면, 본질상 정책 결정 과정에는 공헌이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첩보의 오류로 인한 인권 침해나 비밀주의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점은 유럽연합의 거버넌스가 가진 현실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다. IntCen의 일카 살미(Ilka Salmi) 국장은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한바 있다. “첩보활동을 할 경우 (유럽연합에서) 그 활동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명령은 누가 내릴 것인가?”
 샤를리 에도브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 첩보 활동 강화 논의가 부활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종교 지도자에 대한 풍자가 어느 민족에게 모욕을 주었다면 그것은 테러의 본질과는 구분될 문제다. 테러의 원인이 무엇인지 보다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첩보의 정치화가 우려될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테러리즘에 대한 하나의 대응책으로 첩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 주변국의 불안 요인을 미리 감시하고 안보 역량을 높이기 위해 첩보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정보 네트워크 분야는 첩보가 집중해야 할 새로운 분야로 거론되기도 한다. 회원국 간 정보 공유나 전략 분석 수준을 넘어, 유럽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얼마나, 어떻게 첩보를 정치 안으로 끌어안을 것인지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이른바 ‘첩보의 정치화’와 ‘첩보정치’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나 에단 헌트가 아닌, 첩보정치를 실현시킬 제3의 모델이 출현할 것인가?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現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브뤼셀 자유대학교에서 정치사회학 박사 학위취득. 주요 논문으로 “국제정치학에서 주체물음(2013)”, “유럽연합의 개발협력전략(2013)”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