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호: 2021-02
홍용표 (한양대학교 교수)

[편집자 註]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남과 북, 동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를 위해서도 우리가 반드시 이루어야할 과제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고 지키기 데 있어서 장애물로 작용하는 요인은 남과 북이 각자 ‘평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JPI PeaceNet은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홍용표 교수님의 기고문을 통해 남과 북이 생각하는 ‘평화’란 각각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 차이를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 정승철 연구위원(scchung@jpi.or.kr)]


다양한 평화의 의미

평화연구의 대가인 볼딩(Kenneth Boulding)은 “평화라는 말은 너무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평화의 개념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쓰임새가 가지각색이라는 것이다.1) 2000년 이후 출간된 논문 중 제목에 평화(peace)가 포함된 것들을 분석한 결과, 평화라는 용어가 40여 개의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2) 평화는 말 그대로 ‘인류 보편적 가치’이며, 누구도 그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는 시대적·공간적 상황에 따라, 또는 사용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평화 앞에 어떤 형용사를 붙여 특정 의미를 부각하려 한다. ‘항구적’ 평화, ‘불안한’ 평화, ‘진정한’ 평화, ‘거짓’ 평화 등이 그것이다.

평화연구가 지닌 다학제적, 다차원적 접근법도 평화 개념의 다양성에 영향을 미쳤다. 평화학의 선구자인 갈퉁(Johan Galtung)은 폭력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3가지 유형의 폭력을 제시하였다. 전쟁, 사형과 같은 ‘직접적(물리적) 폭력,’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사회적 차별과 같은 ‘구조적 폭력,’ 그리고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인 ‘문화적 폭력’ 등이 그것이다.3)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는 “소극적” 평화로, 갈퉁이 제시한 3가지 폭력이 모두 없는 상태는 “적극적” 평화라고 일컬어진다. 갈퉁의 적극적 평화는 사실상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친 고통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만큼 넓은 범위를 다룬다. 적극적 평화론을 현실 세계와 접목하기 위해 UNESCO 등을 중심으로 발전된 ‘평화문화(culture of peace)’ 개념도 평화가 “생명에 대한 존중, 자유, 정의, 연대, 관용, 인권, 남녀평등”과 같은 다양한 가치에 기초해 있다고 인식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평화연구의 영역을 확대하였고 다양한 폭력과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그 개념이 너무 광범위하여 학문적 정체성과 정책적 응집성 및 방향성이 떨어진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한국에서의 평화 논의

최근 한국사회의 평화 담론도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서구에서의 평화연구 발전의 영향과 한국에서의 평화 연구에 대한 관심 확대 등으로 평화의 구조적, 문화적 측면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에서의 평화논의는 분단관리 차원, 특히 군사적 긴장 완환 또는 전쟁 방지 문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2019년 통일연구원의 『한국인의 평화의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화’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통일’(26.1%)이었고, 그다음이 ‘비둘기’(18.6%)였다. 이어 ‘전쟁’(6.6%), ‘북한’(6.3%) 등을 떠올렸다. 일반 국민도 평화를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보다는 분단 극복이라는 특수성 차원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쟁의 경험과 냉전문화, 지속적인 북한의 위협, 갈등적 상황이 현존하는 대내외 환경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6.25 전쟁으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전쟁 재발에 대한 두려움, 북한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내재화되었다. 둘째, 북한은 전쟁 이후 각종 도발을 지속하여 왔으며, 특히 핵·미사일 개발을 가속화로 인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은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국제환경적 측면에서 주변 강대국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분단 상황과 어우러져 한반도에 투영되어왔다. 국내적 차원에서는 냉전문화에 기인한 정치적·이념적 갈등이 평화에 대한 시야를 더욱 좁혔다.4)

정책적 측면에서도 평화에 대한 시각을 넓히려는 접근이 시도됐으나, 분단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는 안보를 확실히 챙김과 동시에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평화를 적극적으로 만들겠다”는 정책 기조를 내세웠다. 아울러 “정치·군사적 신뢰구축”과 “사회·경제적 교류협력”의 상호보완적 추진을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 평화를 굳건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심각해짐에 따라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소극적 평화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반도 정책에서 평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졌다. 문재인 정부는 평화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가치이자 정의이며, 번영을 위한 토대”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평화를 지키고, 평화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정책 방향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현 정부의 평화 프로세스 역시 지속되는 북한의 핵위협 등 안보적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평화정책이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남북한 간에는 3차례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우선 2018년 4월 두 정상은 「판문점 선언」에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천명하였다. 이 선언에서 남북한의 정상은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전쟁위험을 해소하는 것”이 민족의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기 위한 관건적인 문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나아가 남북은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하고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5개월 뒤 「평양공동선언」에서는 평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다.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군사분야 이행합의서’ 체결 등 실천적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해 나가기로 하였다. 핵문제와 관련해서도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추진하자는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같은 해 6월 미국과 북한의 정상도 싱가포르에서 만나,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무엇이 원인일까? 여러 가지 환경적, 구조적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주요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평화의 개념에 차이가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아무도 평화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와 목표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말하는 평화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북한이 생각하는 평화

북한이 간행한 『조선말 대사전』을 찾아보면 ‘평화’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 전쟁이나 무장충돌 같은 것이 없는 상태, ② 분쟁이나 반목이 없이 화목한 상태. 이는 한국의 사전적 의미와 유사하다. Naver 사전에 따르면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 등을 뜻한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평화가 포함된 합성어의 의미에는 이념적·환경적 특수성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평화전략’은 “미제가 세계 혁명력량을 말살하고 해외 침략을 강화하기 위하여 들고나온 침략적인 전략의 하나”라고 정의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에 아부 굴종하면서 정의의 전쟁도 포함한 전쟁 일반을 반대하고 무원칙한 평화를 주장하는 반동적인 사상이나 태도”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의 최고 권력자이며 북한의 대남정책 및 대외정책을 주도하는 김정은 위원장은 평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최근 발표된 북한 노동당 제8차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이하 「보고」로 표기)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좋은 자료이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의 「보고」는 ① 총결 기간(즉, 지난 5년간) 이룩된 성과, ② 사회주의 건설의 획기적 전진을 위한 과제, ③ 조국의 자주적 통일과 대외관계 발전을 과제, ④ 당 사업의 강화발전을 위한 과제 등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A4 용지 기준 23페이지 분량의 「보고」에서 김정은은 ‘평화’라는 표현을 14번 사용하였으며, 여기에는 김정은의 평화 인식과 정책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5)

우선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5년간 군사력 부분의 성과와 관련, 북한의 “인민군대가 조국의 령토, 령공, 령해를 믿음직하게 보위”하였으며, “적들의 도발위협을 단호히 제압하며 사회주의 건설의 평화적 환경을 수호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이어 김정은은 “국가 핵무력 건설 대업을 빛나게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핵강국, 군사강국으로 부상”하였다고 천명하였다. 나아가 “우리 인민들이 존엄 높은 강대한 나라에서 영원히 전쟁의 참화를 모르고 번영과 행복을 마음껏 창조해나갈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지난 5년간 이룩한 “가장 뜻깊고 긍지 높은 대승리”라고 자평하였다.

대외관계 부문에서 「보고」가 내세운 업적은 “대담한 로선 전환과 공격적인 전략”을 통해 “국제사회가 공감하는 평화의 기류를 조성하고 대화 분위기를 마련”하였는 것이다. 여기서 북한이 말한 ‘노선과 전략’은 소위 “병진노선”을 의미한다. 즉, “병진로선의 위대한 승리”와 이에 기반한 적극적인 대외활동이 “국가의 존엄과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다. 특히 「보고」는 미국의 “발악적인 공세”로 인한 “엄혹한” 대외환경에서 “공화국의 자주권을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각인”시켰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북한이 미국과의 “역학관계를 극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평화수호의 새로운 정치 흐름”을 만들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자신들의 “자주적 리익”과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는 공화국의 전략적 지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북한 노동당 제8차 당대회 사업총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이야기된 점이 경제적으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핵능력 강화 및 이에 기초한 대외적 지위 상승을 주요 성과로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평화 관련 내용을 보면 북한은 바로 이러한 성과를 평화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김정은은 ‘국가’ ‘공화국’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힘에 기초한 국익 차원에서, 즉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평화 개념에는 대미 인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식 평화 논리는 향후 당 사업 과제에 대한 내용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보고」에서 국방건설을 위한 과업을 제시하면서 꺼낸 첫 마디는 바로 “국가 방어력이 평화수호의 믿음직한 담보”라는 것이다. 특히 김정은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더 극심해”지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국방력의 중요성을 설명하였다: “우리 국가를 겨냥한 적들의 첨단무기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자기의 힘을 부단히 키우지 않고 무사태평하게 있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위험천만한 짓은 없다.” 따라서 김정은은 군사력을 끊임없이 강화해서 미국의 군사적 위협을 억제해야 “조선반도의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남북관계에 대한 내용은 ‘남한 탓’ 논리가 핵심이다. 한반도 평화가 불안한 것은 남한 때문이며, 남한이 하기에 따라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는 현 상황이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대결의 악순환”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평가하면서, 남한에서 지속되고 있는 “군사적 적대행위와 반공화국 모략소동” 때문에 앞으로의 남북관계가 “불투명”하다고 전망했다. 이어 「보고」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군사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남측이 남북합의를 이행하고, 특히 “첨단 군사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북한은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 방안으로 제안한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지원, 개별 관광 사업 등은 “비본질적인 문제”라고 폄훼하였다. 결론적으로 「보고」는 남측이 북한의 “정당한 요구에 화답”해야만–즉 군사력 강화와 한미합동 훈련을 중지해야만–“3년전 봄날”과 같은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에 설 수 있다며 남측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대외관계 관련 과제를 언급하면서도 김정은 위원장은 힘에 기초한 평화의 중요성을 천명하였다. 다음의 「보고」 내용은 평화에 대한 김정은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행성에 우리나라처럼 항시적인 전쟁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는 없으며 그만큼 평화에 대한 우리 인민의 갈망은 매우 강렬하다. 우리가 최강의 전쟁억제력을 비축하고 끊임없이 강화하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이며 영원히 전쟁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열어놓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국가방위력이 적대세력들의 위협을 령토 밖에서 선제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선 것만큼 앞으로 조선반도의 정세 격화는 곧 우리를 위협하는 세력들의 안보 불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은의 평화 논리는 다시 한번 대미정책 방향과 연결된다. 북미관계를 새롭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철회되어야 하며, 북한은 “앞으로도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에서 미국을 상대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어 「보고」는 북한이 “책임적인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대외관계 부분을 마무리하였다. 이와 관련 북한은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우리를 겨냥하여 핵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람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여기에는 자신의 핵무기가 공격용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미국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미국에게 재확인시키고 기정사실화 하려는 북한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화 인식을 지닌 북한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

한반도에서 평화 지키기와 평화 만들기

한반도 평화정착은 우리 자신은 물론, 동북아와 세계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지킬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평화 상태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 정부도 2021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위한 핵심 추진과제로 “남북관계 개선, 남북 정상 간 합의사항 본격 이행 추진,” 특히 「판문점 선언」 및 「평양공동선언」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노력을 내세웠다.

문제는 남북한이 합의한 ‘평화’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차이점이 더 크다. 첫째, 앞에서 살펴봤듯이 김정은의 평화관은 매우 현실주의적이다. 국가 이익 유지와 국가 지위 향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평화수호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이를 위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서구적인 평화 개념에 따르면 매우 ‘소극적인 평화관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북한의 평화 개념 역시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훨씬 심하며 특히 반미주의가 짙게 깔려있다. 셋째, 앞의 두 가지 특징은 결국 북한의 핵보유 정당화 논리로 이어진다. 우리는 ‘비핵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북한은 ‘핵 평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북한은 한국의 군사력 강화가 평화의 걸림돌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갈퉁은 평화란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실제 정책을 수립·이행하면서 ‘힘의 정치’가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비폭력의 중요성이 힘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처칠은 평화에도 “근력(sinews)’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폭력을 위한 힘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생각과 행동에는 단호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과 평화를 논의할 때도 이러한 측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목표가 비핵 평화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핵화 협상은 핵개발이라는 북한의 잘못된 행동을 중단시키고 핵무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비핵화 과정은 말 그대로 길고 어려운 길이다. 또 다양한 접근법이 시도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표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대화와 제재는 모두 비핵화와 평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제재만을 앞세우며 대화를 외면해서는 안되지만, 단순히 대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 제재를 함부로 완화하는 것도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북한이 원하는 핵 평화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고, 대화와 제재 등 다양한 수단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비핵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평화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남북관계의 국가적 차원과 민족적 차원에 대한 균형적 접근이 필요하다. 김정은 시기에 들어와 북한은 ‘국가 제일주의’를 앞세우며 평화문제도 철저하게 국익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김정은은 “국가와 인민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정부도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되 그 과정에서 국가 이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과 위협은 민족 감정을 앞세우며 감싸줄 수 없는 사안이다. 북한은 통일 이후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안보이익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러한 이중성을 분명히 인지하며 정책을 만들고 추진해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평화 담론과 정책 목표의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분단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에서 평화를 보는 시각은 국제사회에 비해 상당히 좁다. 북한의 평화인 식은 더욱 편협하다. 군사력에 의존한 평화수호 논리에 매달리고 있는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단기적으로는 우리도 국익과 안보 지키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단기간 내에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 없는 수준의 평화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현재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평화 아젠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는 기본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의미한다. 한반도 평화도 다르지 않다. 정부간 대화와 군사적 긴장 완화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한반도 구성원의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 제시하는 편협한 평화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고,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평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1] Kenneth E. Boulding, Stable Peace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78).

[2] Peter T. Coleman, “Conclusion: The Essence of Peace? Toward a Comprehensive and Parsimonious Model of Sustainable Peace.” Peter T. Coleman & Morton Deutsch, eds. Psychological Components of Sustainable Peace (New York: Springer, 2012).

[3] Johan Galtung, 강종일 외 옮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서울: 들녘, 2000).

[4] 홍용표, “평화문화와 지속가능한 평화: 한국에서의 의미와 과제,” 『문화와 정치』 제5권 2호(2018).

[5]『조선중앙통신』, 2021년 1월 9일. 아래에서 북한의 평화 인식과 관련해 인용한 내용 중 이탤릭 표시는 필자가 덧붙인 것임.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기획: 정승철 연구위원
편집: 장훈필 연구원

저자소개

영국 Oxford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쳐 2001년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2015년 3월부터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한양대 교수로 복귀한 이후 통일문제, 평화와 안보, 한국외교 분야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