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간호: 2021-28
주재우 (경희대학교 중국어학과)

[초록] 2021년은 남북한이 유엔 동시 가입 3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냉전 말미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일궈낸 성과였던 것이다. 유엔 가입이라는 대한민국 외교의 역사적 성과를 올리는데 몰두한 나머지 당시 남북한에 주는 전략적 함의가 간과된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북한에게 유엔이라는 국제무대가 제공되고, 미국에 유엔본부가 소재한 점이 북한 외교 전략은 물론 북한의 대남, 대미 관계 변화에 가져다준 전략적 의미 조망이 부족했다. 가령 한반도 분단의 고착과 북한의 ‘통미봉남’전략이 현실화될 수 있는 여건과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1. 서론

1991년 9월 17일은 우리나라 외교사에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이날, 우리와 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그러나 가입 여정은 달랐다. 북한보다도 우리가 더 긴 여정 겪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 고무적이었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가입당시에 우리가 기대했던 외교적 효과는 안 보인다. 당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우리의 유엔 가입 시도가 북한이라는 장벽에 부딪히면서 남북한의 동시가입이라는 선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북방정책의 목표와 취지에 부합했기에 동시가입은 정당화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설득력도 있어 보였다. 당시의 기대감은 사라진지 오래다. 현실은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고 한반도 통일은 더욱 멀어져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재평가해봄으로써 향후 우리의 대북전략은 물론 우리의 한반도 외교도 새로이 정립할 필요가 있다.

 

  1. 한국과 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기까지의 과정

우리나라의 유엔 진출은 건국 이후 즉각 이뤄졌다. 1948년 12월 유엔 결의안195호가 대한민국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면서 우리나라는 1949년에 유엔 옵서버국가로 대표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주미대사가 이를 겸직했다. 6.25전쟁 중이었던 1951년에 우리는 유엔에 옵서버국 상주대표부까지 설립할 수 있었다.

이후 우리의 유엔가입신청이 시작되었다. 1949년부터 1956년까지 5차례 가입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했다. 이유인즉슨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의 승인을 모두 받아야하는데 그 중 소련의 반대(veto)에 막혔다. 중국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대만이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의 유엔 가입 신청도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우선, 유엔이 북한을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유엔은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 수립한 기관이었다. 따라서 소련과 몇 개의 위성국가 외에 모든 회원국이 친서방 또는 친미 국가로 주를 이뤘다. 북한이 유엔 가입 신청하기 위해서는 제3국만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즉, 이들이 대리인으로 북한 관련 의제를 유엔에 상정해야했다. 또한 북한이 6.25전쟁이후 제기한 한반도 관련 이슈 또한 같은 경로를 통해서만 제기될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대리인들은 중국, 소련과 제3세계 국가 등이었다.

북한은 유엔 가입 신청을 차치하더라도 더 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이것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UNCURK)와 유엔 사령부의 해체였다. 이런 의제가 북한에 시급했던 이유는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는 북한이 추구했던 한반도의 적화통일, 무력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해산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유엔이 한국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유엔사와 유엔군의 주둔을 정당화한 데 있었다.

주지하듯, 동 위원회는 6.25전쟁 중이었던 1950년 10월에 이와 관련된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사무처도 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설립됐다. 미국은 당시 유엔군의 승리를 전망하면서 3·8선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미국은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전세가 통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하고 통일 이후 민주한국정부가 대의제를 수립하고 파괴된 경제를 재건하는데 유엔의 도움이 따라야하는 것으로 동 위원회의 설립을 합리화했다.

북한이 이 같은 기구의 해산과 해체를 각각 원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엔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에게 차선책은 중국, 소련과 제3세계 국가를 통해 해산 안(案)을 발의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1953년부터 1975년까지 안건은 매년 유엔에 상정되었다. 1960년과 1964년을 제외하고 이들은 북한을 도왔다.

유엔에서 이런 노력이 여의치 않자 북한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전략으로 선회한다. 이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미중관계 정상화 협의였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중국을 비밀 방문한 이후부터 북중 양국의 합작 노력이 개진되었다. 중국이 관계정상화 논의과정에서 두 의제를 협의 대상으로 상정했다. 그 결과 북한은 ‘절반의 승리’를 일궈낼 수 있었다. 1973년 미중 양국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의 해산에 합의했고 유엔은 이를 받아들였다.

미국이 이에 동의한 데는 유엔사의 존속과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해 타협한 결과가 결정적이었다. 미국에게 유엔사의 해체는 미국이 최선을 다해 막아내야하는 최후의 ‘마지노선’과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주한미군의 주둔을 정당하게, 적법하게 이어나갈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협상에서 미국은 이를 철저하게 방어했다. 키신저는 저우를 설득했다. 당시 불안한 한반도의 정세와 주변국의 한반도 전략으로 그의 합의를 도출했다. 키신저는 중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는 유엔사 해체가 한미동맹관계에 미칠 영향과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유발할 가능성을 점쳤다.

중국은 6.25 전쟁이후 북한과 같이 유엔사의 해체와 주한미군의 철수를 시종일관 요구했었다. 그러나 키시저는 미중관계 정상화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일본에 대한 대안이 없이는 모든 것이 시기상조임을 저우에게 상기시켰다. 주한미군의 철수가 한반도의 권력공백을 조장할 수 있어 일본의 군사적 야욕에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저우를 설득시켰다. 이런 전략적 의미에서 중국은 그 후부터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유엔사 해체에 관한 논의가 미중 간의 의제에서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볼 수 있었다.

미중 간의 관계정상화 협상이 한 참이던 1973년에 우리나라는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6.23 선언)”을 발표한다.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통일 이전까지 잠정적으로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로써 남북한이 서로의 유엔 가입을 서로 반대하던 대결 국면을 해결할 수 있는 첫 실마리가 제공되었다. 그럼에도 북한과 사회주의진영의 나라들은 우리의 6.23선언을 모두 반대했다. 이 중 특히 중국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중국이 견지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이었다. 중국은 ‘두 개의 중국’을 부정한다. 때문에 북한과 관련해서도 ‘두 개의 조선(한국)’이 조장되는 그 어떠한 상황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냉전이 종결될 때까지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문제는 답보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냉전의 종결로 우리에게 유엔 가입의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우리나라 정부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북방정책의 결실로 우리나라는 1990년 9월 소련과 수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엔 가입관련 소련의 지지를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이규형 전 주중대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가입 신청 계획을 중국에 알리자 중국 측에서 이의 유보를 당부한 것으로 회고했다. 당시 그는 이 메시지로 낙담하지 않았다. 대신 이듬해에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를 받아들였다.

우리 외교 당국의 판단이 옳았다. 1991년 중국은 우리의 유엔가입신청을 더 이상 반대하기 어려운 입장을 북측에 전했다. 5월3일 방북한 리펑 총리는 연형묵 북한 총리에게 더 이상 반대 입장을 고수하기 어려운 실정을 직접 전했다. 그러면서 남한이 먼저 가입한 후 북한이 가입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최후통첩’과 같은 언지를 전했다고 태영호 전 북한공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밝혔다. 그 결과 북한도 마지못해 우리와 유엔 동시 가입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1.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의 의미

유엔은 우리의 안보 및 한반도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때문에 우리의 성공적인 가입은 고무적인 사건이었고 우리 외교에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선택한 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유의미한 지침서라는 통념에서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평가하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문제와 관련 이 있다. 다른 하나는 주변국의 대북 영향력 감소와 연관된다.

우선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 회원국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국제사회에 이제 ‘두 개의 한국(조선)’이 공인된 것이다. 남북한 모두가 주권국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따라서 통일의 해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평화적인 통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주권이 존중되는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할 것이다. 이제 무력통일의 방식은 최소한 비(非)합법적이라는 인식을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문제인 주변국의 대북 영향력 감소 문제는 북한이 국제사회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한 것과 연관이 깊다. 특히 북한의 적대진영의 국가와의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우선 북한에게 유엔 진출은 북한 외교관이 미국에 상주할 수 있고 미국에 사무실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 북한이 가장 대화하고 싶은 나라가 미국인 점을 감안하면 북한의 유엔진출은 북한에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이미 1973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하면서 7월에 뉴욕에 유엔대표부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문제 논의의 장에 옵서버국으로 초대되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6.25전쟁 이후 원하던 미국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해 미국과 첫 관방회의를 할 수 있었던 외교적 쾌거도 올렸다. 그 이전까지 북한은 수없이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접촉경로를 정확히 알지 못해 번번이 고배를 들어야했었다. 물론 북미 첫 관방회의는 뉴욕에 주재할 북한 외교관과 공관개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한반도문제는 언급 조차되지 않았다.

북한이 잘못된 경로로 미국과의 대화를 모색하는 동시에 제3국을 통해 대화의사를 수없이 미국 측에 전하려했다. 때로는 동구권, 때로는 중동, 또 때로는 서남아시아의 지도자를 통해 대화 의지를 알렸다. 그러나 북한은 그 누구보다도 중국에 의존을 많이 했었다. 특히 미중관계 정상화 논의로 양국 고위급인사의 만남이 빈번해진 것을 이용한 것이다. 역으로 중국은 북한의 이런 갈망을 대북 영향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과의 대화를 위해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중재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고 역량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고, 긍정적인 이면에는 부정적인 것도 존재한다.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무력통일방식을 최소한 불법화시켰기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에서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분단의 고착화와 북한의 외교적 입지를 넓혔다는 관점에서는 우리와 주변국의 대북 영향력 상실의 의미를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과의 대화에서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는 태도로 임할 필요가 있다. 반면 북한도 역시 유엔회원국으로 국제제도, 규범과 법칙을 존중하고 성실하게 준수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겠다. 북한의 태도 전환만이 남북한 유엔가입으로 일어난 한반도의 실익부분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기획 및 편집: 정승철 연구위원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미국 웨슬리언대 정치학 학사, 중국 베이징대 국제정치학 석박사.

전(前)미국 브루킹스연구원 방문학자 역임.

현(現)한중사회과학회 회장.

현(現)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한국인을 위한 미중관계사」, 「팩트로 읽는 미중의 한반도 전략」, 「북중관계: 그 숙명의 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