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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왜 핵을 포기했는가?
등록일
2010-01-15
조회수
7
  스웨덴은 핵을 포기하기까지 일련의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들이 의견 조율을 어렵게 만들었다.

–  반전 및 반핵 세력들의 감정적인 개입으로 때로는 핵 개발에 대한 논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오피니언 그룹들은 물론 정당 내 분열을 일으킴

–  핵 무장 잠재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경제적 명분이 대두됨

–  중립국 스웨덴을 둘러싼 주변 세력국가들의 전략적 기조의 변화가 일어남

–  전략적 환경의 변화가 스웨덴에게 초래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군부 내 합의가 도출됨

–  무기제한(arms limitation process)과 군비축소(disarmament process) 움직임에 대한 세계적인 동조가 시작됨

세계 2차 대전 이후 중립 정책을 고수한 스웨덴은 100여 년 동안 유럽 대륙 내 전쟁은 물론 두 번의 세계 대전에 휘말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립국으로서 주권을 지키기에는 쉽지 많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구 소련 휘하 동구 유럽의 군사력은 수적으로 월등하게 우세하여 스웨덴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을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달랐다. 또한, 스웨덴이 서구 유럽에 군사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동구와의 갈등을 최대한 피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이 수세기 동안 강대국에 둘러싸여있었듯 스웨덴 또한 두 군사동맹세력 사이에 끼여 있었다. 비록 자원은 제한적이었지만 스웨덴은 야심차게 주권국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했다. 다행히 스웨덴의 경제력은 자국민을 보호하기에 충분한 규모와 수준의 강한 군사력을 육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 이후에 대두된 핵 전쟁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전쟁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두 세력권에 편입되지 않은 국가들의 전통적인 안보 정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만해도 핵무기는 지금처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위협보다는 단지 또 하나의 무기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핵무기에 대한 논쟁 초기에는 핵 무기가 발휘할 수 있는 억지력 효과도 아직 확실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핵 억지력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국토 방위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국 군인들에게 다른 국가들보다 열세한 무기를 줄 수는 없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미 스웨덴은 핵무기 개발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고 스웨덴 공군은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전투폭격기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핵 전쟁의 무서운 실체를 알리고자 하는 움직임과 반 핵 여론이 스웨덴 내에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각종 핵 전쟁게임(war games)과 전쟁 시뮬레이션이 동원되어 핵 전쟁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들은 핵 무기에 대한 인식 확산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한 연구 자료는 스웨덴에 200개의 핵 무기가 동원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스웨덴 국민의 30%-40%가 사망하고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무시무시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가상의 수치는 자연스럽게 평화를 지지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지만 여타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정당들은 핵전쟁 관련 가상 시나리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플러스 성장을 달성한 스웨덴은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고 원자력으로 전력을 공급하였다. 이론적으로 스웨덴의 원자력 산업은 중수로를 사용한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과 전력 생산을 위한 경수로 사용이 모두 가능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자국 내 원자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으로 핵폭탄 제조가 가능했고 1958년에는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연구를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일단락 되었다.

또한 스웨덴은 세계 최대수준의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자국 내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은 논외에 부쳐졌다. (당시의 농축기술의 경제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민간과 군부의 협력이 필요했지만 이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따라서 스웨덴은 지금 당장은 핵을 보유하지는 않지만 상황에 따라 핵을 보유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아래 핵 관련 연구를 계속하기로 한다. 이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이었다. 1964년이면 핵 개발에 대한 최종 의사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결국 천연 우라늄을 사용한 스웨덴식 중수로 개발 구상은 폐기 되고 스웨덴은 외산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경수로를 개발하기로 한다. 당시만해도 농축 우라늄은 해외에서 조달할 해야만 했고 평화적 사용만이 허용되었으며 각종 안보 협약의 제약을 받았다. 또한 당시 스웨덴 정부 관리들은 미국 정부 관리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동구유럽이 도발할 시에는 스웨덴 영토가 “확장된 핵 우산 전략”(extended nuclear umbrella)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1964년 서구에서 이미 등장하기 시작한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이라는 새로운 전략이 1967년 NATO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이는 핵 보유국가들이 군사적 충돌이 핵 전쟁 수준으로까지 악화시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주저하고 있다는 신호를 미리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분쟁이 핵 전쟁으로까지 확산되는 문턱을 높여서 미연에 진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전통적 군사력에 대한 중요성이 강화되었고 핵 무기는 주로 전략적 용도의 “정치적 무기”(political weapons)로 간주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로 인해서 중립국 스웨덴은 유럽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전통적인 유형이 될 것이라는 잠정적 판단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웨덴은 외부로부터의 통상적 유형의 도발(conventional attack)을 비 핵 방어 대안만으로도 충분히 억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침공세력은 핵무기 사용 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고 분쟁을 핵 전쟁으로까지 악화시키기보다는 수위조절을 통해 자제(abstain) 할 것으로 분석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바르샤바 조약(Warsaw Pact)의 구상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것을 고려하면 매우 낙관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이 보편적으로 확산되면서 스웨덴은 1968년 전략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비핵화라는 국제사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기로 한 것이다. 1970년 스웨덴은 핵 비확산 조약(NPT Non-Proliferation Treaty)에 서명하여 영구적인 비 핵 보유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는 동안 국제 환경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의 비핵화 지역 건설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라틴 아메리카는 비핵화에 성공하였다. “더 이상의 핵확산을 금지”하고자 하는 협상이 제네바에서 시작되었고 1963년 “부분적 핵 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에 대한 서명이 시작되었다. 제네바에서는 군축회의(Geneva Disarmament Conference)가 시작되고 1968년 NPT 조약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스웨덴은 이러한 움직임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국가 중 하나로서 새로운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써 핵 무기 개발 대신 핵 포기를 선택하였다. 스웨덴의 저명한 핵 전문가 얀 프라위츠(Jan Prawitz)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제 비 핵 체제에 대한 지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해진 가운데 스웨덴의 핵 무기 확보 실효성도 그 어느 때보다 희박해졌다.” 그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번역:김미진

Ingolf Kiesow 대사
The Institute for Security and Development Policy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