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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영토분쟁 ‘차세대 해결론’의 전환
등록일
2010-10-12
조회수
7
 최근 동중국해상에서 발생한 중일 간의 해양영유권 갈등과 중국정부의 초강경 대응은 중국이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견지해온 해양영토분쟁의 ‘차세대 해결론’의 전환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중국해 해상에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다섯 개의 작은 섬과 세 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무인도다. 미국이 1972년 오키나와를 반환한 시점부터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해왔지만, 거리상으로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서쪽으로 420km, 대만에서 북쪽으로 185km 떨어져 있어 일본보다는 중국에 더 가까운 섬이다. 지난 9월 7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의 중국 민간 어선 나포사건을 계기로 센카쿠열도 영유권분쟁은 중일관계의 기존 관행을 뒤집을 정도의 커다란 놀라움과 외교적 파문을 던졌다. 선장 잔치슝을 제외한 나머지 14명의 선원을 조기에 석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조업을 하던 민간어선의 나포에 중국정부가 이토록 강경한 입장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중국정부는 일본에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즉시 무조건 석방’을 주장하며 주중 일본대사를 여러 차례 불러 외교적 압력을 가한데 이어,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원자바오총리가 21일 구속한 선장을 즉시 석방하지 않을 경우, 강력한 대응조치를 강구하겠다고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중국정부의 보복조치는 신속히 실시되어, 베이징 당국의 관광교류중단, 일부 일본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춘샤오 천연가스전의 단독개발 시사, 허베이성 군사시설의 불법 촬영 혐의로 일본인 4명 구속 등 외교압박 카드를 쏟아냈고, 나아가 일본의 하이브리드 첨단자동차와 가전제품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희토류 수출의 중단까지 발표했다. ‘공업의 비타민’으로 불리는 희토류는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자동차의 모터, 친환경 가전, 광자기 디스크, 금속가공과 의료장비에서 활용하는 레이저 등 첨단제품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희소금속으로써 세계 생산량의 97%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거의 전량을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한 상황이었던 바, 일본 재계의 우려는 심대했다.


  결국 일본정부는 9월 24일 오후 선장 잔치슝을 석방함으로써 백기투항에 가까운 외교적 굴욕을 맛보았고, 2주 이상을 끌었던 센카쿠열도의 갈등은 수습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원칙에 따라 사법처리’라는 최초의 입장에서 크게 후퇴하여 중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인 일본의 간 나오토 민주당정권은 이 외교분쟁의 역풍으로 지지율이 12% 이상 급락하는 곤경에 몰렸다.


  중국은 일본과 주변국의 예상을 뛰어넘어 왜 그토록 강공책으로 치달았을까?


  센카쿠열도의 영유권을 두고 일본과 중국의 다툼은 그 역사적 뿌리가 깊다. 일본은 1895년 무주지 선점 원칙에 따라 센카쿠열도를 자국영토에 편입하여 실효 지배 중에 있으며, ‘분쟁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과 대만은 원래 중국 영토이었던 곳을 불법적으로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중국정부는 1992년 영해법을 제정하여 이곳을 자국영토로 명기했다. 센카쿠열도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1968년 10월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의 조사에 의해, 주변 해역의 대륙붕에 풍부한 석유자원이 부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보고된 뒤부터이다. 이후 중일 양국은 물론이고, 대만, 홍콩 등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황이 되었다. 70년대의 중일 양국은 국교정상화 및 평화우호조약의 필요성 때문에 영토분쟁 문제를 표면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78년 중일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해양 영토분쟁은 수면 하에 잠복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 들어 점차 반전되어, 센카쿠열도의 영유권 분쟁과 동중국해에서의 해양자원 갈등이 2004년도 경부터 현안 쟁점으로 등장하여 중대한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동중국해에서 해양영토의 영유권 문제와 더불어, 해양자원 개발을 둘러싼 분쟁이 가속화한 것이다. 1978년 평화우호조약의 체결 당시, 중국의 덩샤오핑과 일본의 후쿠다 수상은 이 센카쿠열도의 영유권 귀속문제를 후세에게 맡기는 ‘다나아게 방식’을 채택하여 분쟁해결을 후세에게 맡기는 타협전략을 선택했다.


  “우선 선반위에 올려두고 나중에 차분히 토론하여 상호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모색하면 된다. 현 세대가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다음 세대가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가 방법을 모색하면 된다.”


  덩샤오핑은 일본의 실효적 점유를 인정하는 양보적 제안, 말하자면, ‘차세대 해결’을 시도했던 것이다. 덩샤오핑의 발언을 통해 나타난 중국정부의 태도를 보면, 중국은 첫째, 당시로서는 해양 영토문제의 해결보다는 평화우호조약의 체결을 통한 상호협력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음이 명백하다. 중국은 평화우호조약의 체결을 통해, 중일 간의 ‘반패권 조항’에의 합의, 민간 경제협력의 확대 및 정부 간 경제협력의 심화를 강력히 희망했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1979년 12월 중국과 일본 간에는 15억 달러에 달하는 복수년도 총액결정의 엔차관협력 패키지에 합의했었다. 둘째, 센카쿠열도와 대륙붕문제는 양국 간에 외교적 갈등이 존재함을 지적한 다음에 그 문제의 해결을 차세대로 미루는 것이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다. 전전 및 전후에 걸쳐 일본 쪽이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던 바, 외교적 쟁점으로서 문제제기만 해두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이었다.


  이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1980년대의 미중일 정치외교관계의 긴밀한 제휴로 인해 수면 하에 잠재되었다. 나카소네 내각기인 1984년 중국 후야오방 총서기의 방일을 전후해 중일관계는 대단히 밀접했다. 일본 국내에서도 1978년, 1984년 등 수 차례에 걸친 ‘중국 피버’가 일어났고, 거시적으로 보면 70년대 말 이후 1989년 천안문사건에 이르기까지 중일관계는 미중일 외교제휴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센카쿠열도의 중일 해양 영토분쟁도 현재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중국의 힘이 강대해지기 시작한 90년대 이후 덩샤오핑의 ‘차세대 해결론’ 정책은 전환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0년대 덩샤오핑의 차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 양국 갈등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중국정부는 센카쿠열도 영유권분쟁과 동중국해 해양자원분쟁에서 다음 세 가지 갈래로 기존의 ‘다나아게 방식’을 전면 전환한 것이다.


  첫째, 1992년 2월 중국정부가 센카쿠열도의 주권과 여타 분쟁지역의 영유권을 단독으로 주장하는 영해법의 통과와 1996년의 ‘유엔 해양법협약’의 비준이다. 여기서부터 센카쿠열도의 영유권 귀속문제와 동중국해에서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획정 및 대륙붕 설정을 두고 중일 양국은 첨예한 대립을 벌이게 되었다. 영해법을 제정한 이후의 중국정부의 태도는 예전과 달리 동중국해 센카쿠열도의 영유권을 명확히 했다. 또한, 중국정부는 해양정책의 체계화를 시도한 바, 1990년대 이후 센카쿠열도를 포함하는 해양정책을 총괄하는 종합적인 정책문서를 마련했다. 대표적인 해양정책 문서는 중국 국가계획위와 국가해양국, 국가과학위가 공동으로 작성한 ‘전국 해양개발계획’(1995년5월)과 중국 국가발전개혁위, 국토자원부, 국가해양국이 공동으로 채택한 ‘해양개발에 관한 국가계획 개요’(2003년5월) 등이 있다.


  둘째, 중국이 센카쿠열도에 대한 해양영유권을 확고히 주장하고 이를 외교적으로 표명하는 행동을 적극화한 점이다. 2004년도 3월 24일 일본정부가 센카쿠열도에 상륙한 7명의 중국인을 체포하자, 중국 외무성은 공츄완 보도국장과 다이빙궈 필두외무차관을 중심으로 센카쿠열도의 영유권을 거듭 주장하며 ‘국제법 위반행위’라고 일본정부를 비판하고, 자국민 7명의 ‘즉시 무조건의 석방’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영유권을 확인하는 결의를 전원일치로 가결시켰지만, 최종적으로는 고이즈미 수상관저에서 ‘일중관계에 저해되지 않도록 대국적 판단’ 견지에서 7명을 강제퇴거시킴으로써 조기해결이 이루어진 바 있다. 또한 2005년 2월 공츄완 외무성 보도관은 일본 우익단체에 의해 건설된 등대를 일본정부가 직접관리하고 재산으로서 보호해 간다는 일본정부의 발표에 대해, “댜오위다오 섬과 그에 부속하는 제 도서는 중국 고유의 영토이며, 일본이 취하는 어떠한 일방적 행동도 위법이며 효력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중국정부의 태도는 이번 2010년 9월에 더욱 적극화되었다. 중국 외교부는 주중 일본대사를 여러 차례 불러 항의했으며, 잔치슝을 석방한 이후에도 “댜오위다오와 부속도서는 중국이 주권을 보유한 중국의 영토로 이번 선원구금과 조사를 포함한 모든 사법조치는 모두 불법이며 무효이다”라고 강조하고 사과와 배상까지 요구하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일본의 사토 외무성 대변인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센카쿠열도는 일본영토가 분명하다”고 밝히고, “이번 사태는 중국어선의 공무집행 방해사건”이며, “중국의 사과 및 배상 요구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셋째, 2004년경부터 동중국해 해양자원분쟁이 날로 격화된 점이다. 중국은 2003년 8월경부터 중간수역에서 츈샤오, 단챠오의 두 천연가스전을 개발 중임을 표면화시켰고, 이에 대항하여 일본정부는 2004년도 7월부터 동 수역 주변의 지층구조를 입체적으로 조사하는 3차원조사를 실시했다. 일본정부는, 2005년 4월 초 중국의 춘샤오, 단챠오 두 천연가스전은 일본측과 연결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자료제공과 개발중지를 요구했다. 중국측의 반응이 없자 경제산업성은 4월 13일 일본 민간기업이 신청한 시굴권을 인가하는 수속에 착수했다. 이 시기는 중국 도시 전역에서 반일시위가 격화된 시기였다. 2005년 5월부터 2006년 5월에 이르기까지 5차에 걸친 양국 외무성 고위실무자회담이 열렸고, 중국은 제3차 회담까지 ‘공동개발’ 논의에 응하지 않다가, 2006년 3월 제4차 회담부터 논의에 응했으나 그 성과는 미진했다. 일본은 EEZ 경계획정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정부가 중간구역 부근의 미묘한 해역에서 일방적인 천연가스 및 원유의 개발과 동중국해에서의 중국의 해양조사선과 해군군함의 급격한 활동증대를 우려했다.
 


  2006년도 이후 중국 후진타오 정부와 일본 자민당 정권은 상호 ‘전략적 호혜관계’에 합의하면서 심각했던 중일분쟁이 진정국면에 접어들었고, 2007년 12월 후쿠다 일본총리와 원자바오 중국총리 사이에 동중국해 해양자원의 공동개발에 합의하면서 영유권분쟁도 수면 하에 잠복했다. 이러한 기조는 2009년 9월 이후 민주당정권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번 2010년 9월의 양국 간 분쟁의 격화는 이러한 합의가 상호 전략적이고 실리적으로 추구되는 일시적 현상인 것임을 입증했다. 일본 민주당정권이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을 제시하고 오자와 전 간사장이 대규모 방중단을 이끌고 우호적인 친중 제스쳐를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해양분쟁에서 한치의 양보를 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강대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힘의 외교’를 전개하면서 앞으로 센카쿠열도 해양영유권 주장을 보다 더 강력히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중국이 베트남, 필리핀 등과 남중국해에서 영유권분쟁 중인 난사군도(영어명: 스프래틀리) 영유권분쟁이나 시사군도(영어명: 파르셀) 영유권 분쟁에도 ‘힘의 외교’를 구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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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기섭
부산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