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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I PeaceNet]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한국에 주는 함의: 갈등 해결에서 관리로
등록일
2021-07-19
조회수
7
기획자 註 2020년 9월, 미국의 중재 아래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중동은 평화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21년 5월,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중동에는 여전히 갈등의 씨앗이 남아 있으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이 이토록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중동에서의 이러한 갈등양상이 한국의 외교정책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JPI PeaceNet은 서강대 유로메나 연구소 성일광 교수님의 기고문을 통해 중동 갈등의 기원, 갈등의 전개 과정, 이스라엘과 중동국가들 및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협상 과정과 그 결과, 그리고 이 모든 과정과 결과가 한국에 주는 사시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 정승철 연구위원(scchung@jpi.or.kr)]
  1.  서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1882년부터 시작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대규모 이주에서 출발한다. 시온주의에 영감을 얻은 전 세계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몰려들면서 이미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아랍인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유대인들의 이주는 단순히 아랍인들의 땅을 무력으로 강탈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대부분은 아랍인 지주들에게 웃돈을 주고 유대인과 유대인 재단이 매입한 것이다. 유대인과 아랍인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심해지면서 골치를 앓던 영국은 1937년 필위원회(Peel comission)를 구성하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필위원회는 유대인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로 나누는 분할안을 제안했고 아랍인들은 단번에 거절했지만 유대인은 논의가 필요하다며 여지를 남겼다. 1947년 UN 역시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로 나눠 2개 국가를 세우는 해법안을 제안했다. 유대인은 분할안을 수용했지만 아랍인은 거부했고 결국, 1948년 유대인들은 일방적인 독립 국가를 선언하고 이집트,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은 일제히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아쉽게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두 차례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역사엔 만약이 없다지만 1947년 양측이 진지한 협상을 통해 분할안을 수용했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해결되거나 지금과 같이 만성화된 갈등으로 남진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초기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었지만 주변 아랍국가가 팔레스타인 측을 돕겠다며 전쟁에 동참하면서 이스라엘-아랍 분쟁으로 확대됐다. 아랍세계는 이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한 발짝 벗어나려 한다. 그 첫걸음이 바로 작년 이스라엘과 UAE, 바레인이 맺은 관계 정상화 합의이다. 아니 아랍국가의 정상화는 이미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1994년 요르단과 각각 평화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아랍세계는 지금까지 약 70년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해결을 위해 직접 참전해 피를 흘렸고 평화협상을 중재하기도 했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해결책은 여전히 요원한 상황에서 아랍세계는 이제 지쳐 보인다.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효용성이 과거만 못하기 때문에 아랍세계의 관심이 떠난 것이다. 이제 더는 정권의 안위를 위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팔레스타인 민족을 지지하거나 지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랍세계의 대오각성은 맑스주의 정치학자이며 역사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언명한 “상상의 공동체”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아랍세계는 공통의 언어, 역사와 문화에 기반한 아랍 민족주의이건 사회주의에 기반한 아랍 사회주의이건 간에 ‘가공의 이데올로기’는 더는 사회를 이끌 원동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성급히 샴페인을 터트리며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며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적어도 아랍세계에서 통한다고나 할까. 아랍세계는 자국 중심의 합종연횡이 이뤄줬으며 걸프 아랍국가는 화석연료 경제에서 탈피하기 위한 산업 다각화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4개 아랍국가가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했다는 사실이 아랍세계의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을 방증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해결을 의미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집착하기보다는 현 상황에서 양측이 평화롭게 공존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왜 갈등 해결이 더 어려워졌고 해결보다는 관리가 차선책이 될 수 밖에 없을까.
  1. 갈등의 변곡점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전쟁 종결 이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요르단과 이집트에 반환했다면 팔레스타인 문제는 존재하지 않거나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이 전쟁 이전과 같이 요르단의 영토로 남아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요르단화가 진행됐다면 요르단의 국민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가자 지구는 이집트군 통치가 이어져 하마스와 같은 이슬람 급진주의 단체가 크게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요르단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그 대가로 요르단강 서안을 돌려주겠다는 이스라엘의 꼼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더 큰 문제는 단순히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도록 정부가 승인했다는 것이다. 초기 소수의 유대인이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숫자는 점차 불어나 요르단강 서안에 무려 50만명, 동예루살렘에 약 20만명이 거주한다. 국제법상 점령지에 자국 인구를 이주시키거나 거주지 원주민 인구의 변화를 가져오는 정책은 금지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영토 차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증폭시켰으며 아랍세계와의 관계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1. 1차 인티파다 폭발과 파급효과
1987년 시작된 팔레스타인 무장봉기 인티파다는 이스라엘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을 효과적으로 통제 가능하다고 믿었고 많은 수의 주민이 조직적인 저항을 감행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인티파다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었다. 이스라엘은 대응법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첫째는 정치적 해법을 통해 PLO와 협상해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두 번째 주장은 강경책으로 영토 타협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은 정치적 해법으로 먼저 가자 지구에서 정착촌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츠하크 라빈 국방장관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는 팔레스타인 국가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강경진압, 정치범 추방, 정치적 암살, 억류, 통금, 경제 제재, 학원 폐쇄, 지역 시설 파괴 등의 정책으로 몰아붙였다. 인티파다는 UN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이스라엘 비판에 열을 올리게 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미국의 대이스라엘 정책이 바뀐 것이다. 1988년 미국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합법적 협상 상대로 인정했으며 미국여론도 친이스라엘에서 친팔레스타인으로 많은 이동이 발생했다. 인티파다로 손해를 본 국가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이다. 1988년 7월 31일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요르단의 법적·행정 구속력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요르단은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점령 이후에도 서안지구 공무원 3분의 1의 임금을 지급해 왔지만 이제 중단하겠다고 한 것이다. 대신 이스트 뱅크 (요르단강 동안)는 요르단의 영토임을 확실히 했다. 후세인의 서안 포기 선언은 PLO 입지 강화와 이스라엘 중도좌파 연합 세력이 추구해온 ‘요르단 옵션’의 종결을 의미했다. 요르단 옵션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요르단에 통합시켜 정치 경제 연합체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결국 이스라엘 단독으로 PLO와 문제 해결해야 하는 새로운 결과를 낳았다.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하마스라는 이슬람주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단체의 창설을 불러왔다. 하마스에 대한 초기 이스라엘 대응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전략으로 온건파 팔레스타인 정파 파타흐(Fatah)에 대항하는 하마스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았지만, 하마스가 과격화되면서 창설자 아흐마드 야신을 투옥시켰다. 하마스는 1993년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화해과정을 방해하기 위해 1994년부터 자살 폭탄 테러를 시작했다.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PLO 의장은 1988년 11월 알제리 팔레스타인 민족의회(PNC) 회의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두 국가 해결안을 제시한 1947년 11월 29일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을 수용했다. 또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과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UN 안전보장이사회가 합의한 결의안 242호, 338호를 수용하겠다고 했다. 결국,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가 아닌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 국경으로 이스라엘이 철수하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을 세우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스라엘 반응은 냉담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상을 중재하고자 했으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는 반대했다. 반면 이츠하크 라빈 국장 장관은 기존의 강경 자세에서 협상으로 선회하고 단계적 해법을 제안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가 완료되면서 국제정치뿐만 아니라 중동정치 지형도 큰 변화를 경험했다. 양극 체제에서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로 바뀌면서 미국에 유리한 국제환경이 조성됐다. 소련의 지원을 받던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입지가 약화했고 미국이 중재한 마드리드 중동평화 회담 참여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발생한 걸프 전쟁 역시 역내 정치 구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요르단 후세인 국왕은 사담 후세인을 감싸는 발언으로 서방세계의 분노를 산 만큼 마드리드 회의에 동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라파트 의장도 사담 후세인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면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해 마드리드 협상에 참여하라는 미국의 압박을 거부할 수 없었다. 샤미르 총리 역시 마드리드 회담을 원치 않았으나 미국의 대이스라엘 담보 대출 100억 달러를 동결시키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마드리드 회담은 최종 평화안을 도출하지 못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 단계적 접근법으로 잠정협정도 가능하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1988년 후세인 국왕의 서안 포기 선언으로 수면으로 가라앉았던 서안과 요르단을 통합하는 연방체 구성안이 다시 논의됐다. 마드리드 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2년 후 오슬로 협정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 오슬로 협정과 희망 고문
이스라엘이 PLO와 직접협상에 임한 것은 이스라엘 외교사에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기 전 양측 대표는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약 1년간 직접협상을 진행했다. 오슬로 협정이란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은 라빈 총리, 페레스 외무장관, 요시 베일린 등이 직접협상을 주도했다.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협상을 지원했고 아부 알라(아흐메드 꾸레이)가 협상대표로 참여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들의 자결권을 인정하라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나 최종결과에 대한 합의 없이 잠정협정을 시도했다. 페레스는 이스라엘이 먼저 가자 지구를 철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라파트는 가자지구와 여리고까지 철수하라고 역제안했다. 라빈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보았고 결국 아라파트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협정 체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여리고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경찰이 내부치안을 담당하고 이스라엘은 외부 치안을 담당했다. 요르단강 서안의 5개 분야 교육, 의료, 사회복지, 조세와 관광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했다. 오슬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행이 늦어졌고 요르단강 서안의 정착촌은 증가했으며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민의 경제 상황은 더 악화했다. 말 그대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 모두에게 희망 고문의 시기였다.
  1. 2차 인티파다와 오슬로의 폐기
오슬로 협정의 골자는 5년간의 팔레스타인 자치 기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오슬로 협정은 혁명적인 합의였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의 가장 어려운 사안은 추후 협상키로 하고 논의를 미뤘다는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갈등의 핵으로 남아 있는 의제는 바로 예루살렘 지위,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 국경확정과 난민 등이다. 오슬로가 이행되지 못한 이유는 많이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을 꼽으라면 협정을 이끌었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당한 것이다. 1995년 라빈은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극우파 유대교인 청년의 총탄에 쓰러졌다. 라빈 총리 암살은 이스라엘 사회의 분열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극우파들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막기 위해 총리 암살도 서슴지 않으며 성서에 등장하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광신적인 애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97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헤브론 협정’(Hebron agreement)을 통해 팔레스타인 서안 도시 헤브론 80% 지역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1998년 다시 서안지구 11%에서 철수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넘기겠다고 약속하는 ‘와이리버 각서’(Wye River Memorandum)에 합의했지만 그를 지지하던 유대교 정당이 반발하면서 결국 연립정부가 붕괴되고 말았다.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과의 화해는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고 2009년 다시 총리직에 오른 후에는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네타냐후 총리도 적극적인 평화협상에 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를 이어 총리직에 오른 에후드 바라크의 평화협상 실패가 오슬로의 폐기를 앞당긴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총리 선거 캠페인에서 아라파트 의장과 단번에 협상을 마무리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홍해 휴양도시 샤름 앗셰이크와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빗에서 협상을 이어갔지만 결국 2000년 마지막 협상이 실패한 이후 제2차 인티파다 발생했다. 평화협상 실패로 실망한 팔레스타인 국민감정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아리엘 샤론이 성전산에 출입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2차 인티파다는 ‘알아끄사 인티파다’라는 예명이 붙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동참하면서 사망자는 급증했다.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 298명, 이스라엘 내 아랍인 13명과 이스라엘 시민도 43명이 사망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최종지위 문제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피력해 발표한 것이 바로 ‘클린턴 초안(Clinton parameters)’이다. ‘클린턴 초안’의 핵심은 “예루살렘을 위한 난민 귀환권 포기”로 팔레스타인 측은 일부 극소수 외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이스라엘 내 귀환을 포기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의 귀환을 허용하고 예루살렘의 주요 지역을 얻는 것이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측은 동예루살렘, 예루살렘 구(舊)시가지 아랍지역 통치권과 하람 앗샤리프(성전산)의 주권을 얻지만 이스라엘은 구시가지 유대인 지역과 통곡의 벽의 관할권을 얻는다. 요르단강 서안지역의 97%를 팔레스타인 측이 돌려받고 나머지 3%는 이스라엘이 보전해 주는 대신 요르단강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80%는 이스라엘 주권 하에 남게 된다.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큰 틀에서 이 초안을 수용했지만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정을 요구했다. 클린턴 초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에 득보다는 실이됐다. 이스라엘 여론은 팔레스타인 측에 크게 양보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팔레스타인 측 역시 합의안 도출에 실패했다는 실망감만 쌓이는 역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1. 하마스의 부활
하마스의 선제 로켓 공격으로 시작된 지난 5월 발생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확실히 하마스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마스의 전쟁은 대이스라엘 항전임과 동시에 PA가 아니라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진정한 수호자임을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하마스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향배를 결정짓는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다. 하마스는 어떻게 PA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을까. 이스라엘이 PA를 홀대한 정책이 오히려 하마스를 성장시켰다. 최근 10년간 이스라엘의 입장은 압바스 수반은 더는 평화협상을 이끌 능력이 없는 만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기 집권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압바스 수반을 무시하고 PA를 소외시켜 왔다. 그 결과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주민의 기대에 부응하고 희망을 주는 유일한 정파로 자리매김했다. 온건 정파 PA를 지지하고 지원해야 할 이스라엘이 오히려 압박하면서 강경파 하마스가 대안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하마스는 예루살렘이 가지는 종교적·민족적 상징성을 강조하고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은 물론,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시민들까지 아우르는 이슈로 부각시켰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 팔레스타인 주민들까지 폭동에 동참하도록 부추겼고 가자 전쟁 중 이스라엘 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발생했다. 네타냐후는 또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아랍국가들이 압바스 수반을 설득해 이스라엘의 평화안을 수용하도록 하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었다. 작년 이스라엘은 UAE와 바레인과 관계 정상화를 체결한 아브라함 협정을 시작으로 수단과 모로코와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이런 전략을 구체화했다. 그러나 압바스 수반과 대화하지 않고 아랍국가의 도움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네타냐후의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마스의 입지만 강화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협상보다는 무장투쟁을 통해 이슬람 가치에 기초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하마스의 지지도는 압바스 수반이 주도하는 파타흐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눈에 PA는 이스라엘과 치안을 공조하는 배신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 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부패한 PA의 개혁작업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80세가 넘은 고령인 압바스 수반의 뒤를 이어 PA를 이끌 새로운 지도자가 절실한 상황이다. 여기에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에 큰 진전이 없다면 PA의 앞날은 암울하다. 반대로 지속적인 무기 개량으로 사거리가 부쩍 늘어나고 정확도도 높아진 로켓으로 무장한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역사가 한국에 주는 함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해결의 가장 좋은 해법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 하마스의 득세와 PA의 무능함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국내정치 구조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용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총리가 누가 되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합의한다면 연립정부는 그날로 붕괴되고 새로 총선을 치러야 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중도 우파 정당은 거의 모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반대하는 만큼 연정을 탈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협상 최종 타결이라는 큰 목표보다는 현 상황에서 양측간 무력충돌을 막고 공존할 방안이 필요하다. 예컨대 요시 베일린 같은 이스라엘 좌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연방제가 있다.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은 팔레스타인 관할권 아래에 그대로 살게 하고(따라서 정착촌 철수가 필요하지 않다) 그 숫자만큼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 내에 살도록 하는 것이다. 국경은 1967년 국경으로 정하고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성지는 공동 관리하는 방안을 택하고 팔레스타인의 치안은 다국적군이 보장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이 공동으로 군을 지휘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착화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북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당시 중동에 평화가 올 것처럼 전세계가 열광했지만 결국 5년 안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실패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만큼 평화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고 합의보다 합의이행이 더 어렵다는 교훈을 준다. 지나친 낙관론이나 서두름도 금물이다. 둘째 오슬로 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것은 미국의 중재나 관련국 중심의 다자회담이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이 1년간 비밀리에 협상을 과감히 추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국의 눈을 피해 비밀협상을 진행하는 것은 어려운게 현실이나 남북한 당사자의 노력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만큼 설득과 화해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셋째 남북관계 개선 방향은 큰 목표를 설정하돼 고집하지 않고 실현 가능한 협력사업을 먼저 추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런 협력사업을 통해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고 한반도의 안정화에 주력하는 것이 의도치 않은 무력충돌을 막고 평화로 가는 큰 디딤돌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자료
  • Avi Shlaim, The Iron Wall: Israel and the Arab World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1).
  • Charles D. Smith, Palestine and the Arab-Israeli Conflict: A History with Documents (Bedford: St. Martin's 2020).
  • “Clinton Parameters” in BICOM (Britain Israel Communications and Research Centre). https://www.bicom.org.uk/timeline/the-clinton-parameters/ (접속일 7월1일)
  • Ze’ev Schiff and Ehud Ya’ari, Intifada: The Palestinian Uprising-Israel's Third Front (New York: Simon & Schuster, 1990).
  • 성일광 “이슬람 테러리즘과 중동분쟁” 「세계지역의 이슈:갈등과 협력」 계명대학교 국제학연구소 학술총서 02 (서울:명인문화사, 2021).

기획: 정승철 연구위원 편집: 우장민 연구보조원

성일광 교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중동학 석사를 텔아비브 대학에서 중동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 전문위원이며 한국이스라엘 학회장이다. 저서로는 Mamluks in the Modern Egyptian Mind: Changing the Memory of the Mamluks, 1919-1952 (Palgrave macmillan, 2017)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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