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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공동성명에 투영된 ‘평화적 두 국가론’의 딜레마(이상수, 초빙연구위원) [출처: 통일뉴스]
날짜
202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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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통일백서>에 명시된 ‘평화적 두 국가론’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브뤼셀에서 날아온 소식은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이재명 정부가 사실상의 분단 수용을 ‘평화공존’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싸서 내놓은 순간, 제11차 한-EU 정상회담 공동성명은 북·러 밀착을 규탄하며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압박 대열에 동참하는 엇박자를 연출했다. 한국과 유럽연합(EU)의 공동성명이 북-러 군사협력을 불법으로 규정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자, 북한은 이를 명백한 주권침해이자 대결 선언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북한이 외무성 담화를 통해 한국을 미국의 침략을 돕는 ‘단검’이자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제1의 적대국’으로 재확인한 것은, 그간 위장해 온 평화의 가면을 스스로 벗어 던졌다는 식의 적반하장식 명분 쌓기다. 결국 이번 반발은 국제사회의 촘촘해진 대북 공조 전선에 직면한 북한 정권이 느낀 안보적 고립감과 초조함을 거친 언사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한반도 내에서는 "우리끼리 각자 잘 살자"며 손을 흔드는데, 밖에서는 가치 동맹의 최전선에 서서 북한을 향해 비난의 공세를 가하는 형국이다. 내부와 외부의 호흡이 어긋나는 이러한 비동기화 현상은, 단순한 외교적 역량의 미숙이나 시행착오에서 기인한 결과가 아니다. 이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특수성과 글로벌 다자 안보 규범이라는 보편성이라는, 본질적으로 결을 달리하는 두 가지 핵심 가치를 동시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표출된 구조적 진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연 탈분단이라는 고유한 평화 기획과 글로벌 다자 안보라는 보편적 압박 노선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할 수 있을까. 이 기묘한 모순의 이면에는 한국 외교가 결코 비껴갈 수 없는, 아니 외면하려 할수록 도리어 발목을 옥죄어오는 세 가지 치명적인 구조적 딜레마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 대북 패러다임의 외연적 불일치 현상이다. 현 정부의 대북 접근법은 기존 정권과의 명확한 단절을 선언하는 데서 출발한다. 2026년 <통일백서>의 핵심은 흡수통일론의 공식적 폐기와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의 전면화로 요약된다. 이는 남북관계를 사실상의 영토적·정치적 두 국가 체제로 인정하되, 제도적 결합을 향해 나아가는 잠정적 공존 모델이다.

이러한 정책 기조의 변화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에 맞서 ‘평화적’ 프레임이라는 비대칭적 카드로 대화 동력을 확보하려는 고도의 포석이다. 분단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영토 조항과 통일 지향성을 규정한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겠다는 고육책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글로벌 다자 안보 무대에 이르는 순간 단절된다는 점이다.

6월 10일 브뤼셀에서 채택된 한-EU 공동성명의 결은 완전히 달랐다. 성명은 북·러 간 불법 군사협력을 강력한 어조로 규탄했으며,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동시에 인권 문제를 정조준했다. 결과적으로 한·미·일·EU로 이어지는 글로벌 안보 가치사슬의 결속을 과시한 셈이다. 대내적 타협 노선과 대외적 가치 외교의 결합을 단순한 정권의 ‘이중성’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이러한 불일치는 치명적이다. 국내에서는 남북 특수관계의 연속성을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신냉전 격랑 속 서방 진영의 대북 전방위 압박 전선에 깊숙이 가담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동기화는 한국 외교의 일관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북한에 평화적 두 국가론을 기만전술로 규정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둘째, 북한의 공세적 명분화이다. 예상대로 평양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공세적이었다. 한-EU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사흘 만인 6월 13일, 북한 외무성 제10국은 담화를 통해 한국의 다자 외교 행보를 ‘체제 말살 노선의 제도화’로 규정하며 거칠게 반발했다. 북한은 한국 정부의 유화적 제스처를 외교적 ‘가면’으로 몰아세웠다. 나아가 한국이 서방의 대북 공조에 동참했다는 사실 자체를 자신들의 ‘적대적 두 국가 장벽화’ 노선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

이러한 역설의 뿌리는 구조적인 데 있다. 서울이 아무리 전향적인 평화 메시지를 발신하더라도, 한국 외교가 한·미·일·EU 안보 블록의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는 한 일방적인 유화책은 추동력을 갖기 어렵다. 북한은 한국 외교의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침소봉대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고, 군사적 도발의 정당성을 축적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평화적 두 국가론은 분단 고착화를 막고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으나, 글로벌 다자 안보 구조와 충돌하면서 도리어 분단을 영구화하는 기제로 오독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국내 평화 기조의 유지와 국제 동맹 체제에서의 책임 이행이라는 두 가지 요구가 정면충돌하는, 신냉전기 한반도 지정학의 한계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현재의 교착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우회형 비판적 관여(De-linking)로의 정책 전환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모순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정교한 전략적 수정이 요구된다. 우선 정부는 ‘평화적 두 국가론’이 영구 분단의 수용이 아니라, 통일의 전 단계로서 남북연합을 지향하는 국가 연합 성격의 잠정적 구상임을 대내외에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이는 소모적인 위헌성 논란을 조기에 차단하고 헌법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자 안보 체제의 제재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대북 협상의 교착을 타개할 수 있는 ‘우회형 비판적 관여(De-linking)’ 모델의 도입이다. 한국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대신 EU나 스위스, 노르웨이 등 전통적 중립국 기구를 가교로 활용해 기후 안보, 연성 안보(식량·보건·재난), 경제 협력 등 비정치적 의제를 다자 채널로 제시하는 분리 접근법이다. 일례로 한-EU 공동성명의 큰 틀에서 비핵화 압박 기조는 유지하되, 이와 철저히 분리된 별도 트랙으로 ‘남북·EU 3자 기후변화 공동 프로젝트’나 인도주의적 보건 협력 메커니즘을 가동하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이러한 다층적 접근은 북한이 제기하는 외교적 공세의 명분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접경 지역에서의 우발적 군사 충돌을 방지하는 실질적인 외교적 안전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접근법은 무조건적인 유화책도, 경직된 강경론도 아니다. 신냉전 구도 속에서 한국 외교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남북 특수관계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최적의 현실주의적인 평화공존 실행 모델이다.

현재 한-EU 공동성명의 강경한 매파적 기조와 평화적 두 국가론이 부딪히며 발생한 파열음은, 우리 외교가 마주한 구조적 외줄 타기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순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직시할 때 비로소 새로운 돌파구가 열린다. 글로벌 안보 규범을 준수하면서도 한반도의 특수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와 연대해 북한의 도발을 통제하되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우회형 비판적 관여(Circumstantial Critical Engagement)’ 전략으로의 정교한 전환이 필요하다.

결국 정부가 지향하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동력은 대외 압박 전략과 대내 평화 정책이 마찰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정합성에서 나온다. 냉혹한 분단 현실을 인정하는 리얼리즘의 토대 위에서만 평화공존이라는 미래 가치도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이제는 명분과 현실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지지를 견인하는 동시에 남북 관계의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는 유연하고 균형 잡힌 외교 해법(FOBD, Flexible & Optimal Balanced Diplomacy)을 적용할 때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